아소, 님하

작가 최명희

최명희(崔明姬) Choi Myeong Hee

전주는 세월이 지날수록 깊은 맛이 나는 도시다. 소설가 최명희는 전주를 ‘꽃심 지닌 땅’이라고 했으며, 조선시대 서거정은 『공북루기』(珙北樓記)에서 전주를 아조선근본지지(俄朝鮮根本之地 우리 조선의 근본 되는 땅)라 하여 각별히 상서로운 곳으로 높여 불렀다.

전주는 작가의 고향이자 문학 열정을 불태웠던 곳이다. 전주 풍남동(당시 화원동)에서 태어난 작가는 풍남초등학교(1960년 졸)와 전주사범학교 병설중학교(1963년 졸), 기전여자고등학교(1966년 졸)를 거친 뒤, 2년간의 공백기를 가진 다음 1968년 영생대학(현 전주대학교) 야간부 가정과에 입학하여 2학년을 수료했다.
이 기간 중 작가는 모교인 기전여고에서 서무직에 종사하기도 했다. 1970년 전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3학년에 편입해 1972년 졸업과 동시에 기전여고에 교사로 부임하여 서울 보성여고로 옮기기까지 2년 동안 국어교사로 재직했다. 『혼불』 출간 이후, 1997년 전북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98년 12월 11일 몹시도 차고 매운 날, 지병인 난소암으로 영면(永眠), <전주시민의 장>으로 장례 후 모교인 전북대학교 부지 건지산 중턱에 안장됐다.

1940년대

• 1947년 10월 10일
1947년 음력 10월 10일 전북 전주시 풍남동(당시 화원동)에서 일본 와세다 대학 법학부로 유학한 당대의 지식인이었던 아버지 최성무씨와 전남 보성군 득량면 출신의 양천 허문으로 깊이 있는 이품과 예술적 조예를 겸비한 매우 현숙한 부인이었던 어머니 허묘순씨의 2남 4녀 가운데 장녀로 출생하였다.
본적은 전북 남원군 사매면 서도리 560번지. 작가의 본관은 삭녕으로 조선 세종 조에 장원급제하여 이후 성종 조까지 대제학과 영의정 등 삼정승을 두루 거쳐 영성부원군에 오른 명신 문정공 최항은 작가의 19대조 훈민정음 창제에 공이 크신 분이었으니 작가 최명희가 근원에 대한 그리움을 좇아 아름다운 모국어를 진주처럼 새겨 작품을 이루려 했던 정신은 이러한 조상의 인연과 무관하지 않다.

"제가 태어난 곳은 전라북도 전주시 화원동이라고 하는, 지금은 ‘경원동’이라고 이름이 바뀐 그런 동네입니다. (중략) 전 이상하게 전라북도 전주시 화원동 몇 번지라고 했을 때, 그 어린 마음에도 ‘화원동’이라는 이름이 그렇게 제 맘에 좋아서, 굉장히, 제가 뭔지 아름다운 동네에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 그 ‘화원’이라고 하는 그 음률이, 그 음색이 주는 울림이 저로 하여금 굉장히, 제 마음에 화사한 꽃밭 하나를 지니고 사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주곤 했어요." ∥1997년 11월 8일 국립국어연구원 강연록 「혼불과 국어사전」 중에서(작가의 출생지인 ‘화원동’은 1946년부터 1957년까지 불렸던 지명이다. 1957년 경원동 3가로 바뀌었다가 1974년 경원동, 1996년 풍남동으로 바뀌었다.)

1960년대

• 1960년 2월
전주풍남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전주사범학교 병설중학교에 입학했다.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이던 1961년 콩트 완산 동물원이 ‘당선작품’이란 수식어를 달고 교지 에 실렸다.
• 1963년 3월
전주기전여자고등학교에 입학했다.고교 시절 작가는 청소년 문사들이 모이는 전국 단위의 굵직한 백일장과 문학콩쿠르에서 장원을 도맡아 공포의 자주색(당시 기전여고의 교복이 자주색이었음)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천재 문사로 이름을 날렸다.
• 1964년 5월
고등학교 2학년이던 이 해에 동국대학교 주최 제 2회 전국고교생 문학콩쿠르에서 「잊혀지지 않는 일」 로 소설부 장원으로 뽑혔다.
• 1964년 9월
 출판협회가 주관한 전국 독서 감상문 대회에서 스칼렛 오하라의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글 형식의 독후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읽고」 가 초등부에서 일반부까지   통틀어 전국 특등으로 당선되었다.
• 1965년 9월
연세대학교 주최 전국남녀고교생문예콩쿠르와 10월 대전대학과 미국오스틴대학교가 공동주최한 전국남녀고교생문예콩쿠르에서 수필부 장원에 뽑혔다. 특히, 연세대학교에서 수상한 수필 「우체부는 작품성을 높이 인정받아 1968년부터 1981년까지 고등학교 작문교과서(박목월-전규태 공저, 정음사)에 예문으로 실렸다. 학생의 작품으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 1966년 2월
전주기전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급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과 가정환경으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2년의 공백기를 가진 최명희는 1968년 영생대학(現 전주대학교) 야간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해 2년을 수료했다(1968.03.01∼1970.02.28). 이 기간 최명희는 기전여고 서무과에서 근무했다(1967.11.10∼70.2.28). 이때의 혼란과 방황, 배움에 대한 의지는 훗날 소설가로 성공할 수 있는 큰 바탕이 되었다.

1970년대

• 1970년 1월 
전북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 3학년으로 편입했다. 단편소설 정옥이가 전북대학교 제16회 학예상, 단편소설 탈공이 숙대신보사 제2회 대학문학상, 수필냇물이 제1회 전국대학문화예술축전 우수작품으로 뽑히는 등 단편소설과 수필로 여러 대학의 문예공모전에서 수상하며 문학의 재능을 인정받는다.
• 1971년 1월
전북대학신문에 일기 「내 나이, 나의 키 2」를 발표하였다
• 1971년 2월
전북대학신문에 일기 「내 나이, 나의 키 3」을 발표하였다.
• 1971년 3월
전북대학신문에 일기 「내 나이, 나의 키 4」를 발표하였다.
• 1971년 10월
단편 「脫空」으로 숙대신보사에서 주는 제2회 대학 문학상을 소설 부문에서 받았다. 이 작품은 전북대학신문에 세 차례에 나누어 연재되었다
• 1971년 12월
전북대학교에서 주는 제 16회 교대 학예상 소설 부문에 단편 「貞玉이」가 뽑혔다. 이 작품은 12월 31일자 전북대학신문에 실렸다
• 1972년 2월
전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 1972년 3월
전주기전여고에 국어교사로 부임해 2년 동안 재직하고, 1974년 서울 보성여자중고등학교로 옮긴 뒤 1980년 5월 그만둘 때까지 7년, 합하여 9년간 국어교사를 지냈다.최명희는 이 시기를 ‘삶의 실체에 내던져진 내가, 삶을 감당하기 어려워지기 시작했던 무렵’이라고 말한다. ‘왜 그렇게 못 썼을까? 절필이라는 말은 마땅하지 않고…. 정말 너무 너무 쓰고 싶은데 그게 안 돼서 괴로운 시간’이었다. ‘땅속 씨앗의 시절’. 그러나 최명희는 안 써진다고 쓰지 않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줄곧 일기와 편지를 쓰면서 왕성한 습작기를 보냈다. 단편소설 데드마스크, 수필 오동나무 그림자처럼 등은 이 기간에 발표된 작품이며, 전체적으로 발표한 편수는 많지 않지만, 이 시기는 대학시절과 「혼불」 집필기를 이어주는 가교로 문학적 체험과 형상화의 방법에 대한 고민이 깊었던 때다.

1980년대

• 1980년 1월
중앙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단편 「쓰러지는 빛」으로 당선되었다.
• 1980년 5월
단편소설 정옥貞玉를 한국문학에 발표하였다.
• 1980년 8월
 단편소설 만종晩鐘을 전북대학교 학도호국단에서 나오는 『비사벌』 제8집에 발표하였다.

그해 4월 교통사고로 6개월간 병원에서 생활했다. 그 절망의 병상에서 파란 인광을 내뿜으며 시작한 소설이 「혼불」이다. 그때부터 작가는 자신의 표현처럼 ‘마치 한 사람 의 하수인처럼, 밤마다 밤을 새우면서,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사람들의 넋이 들려, 그들이 시키는 대로 말하고 가라는 대로’ 내달렸다. 최명희에게 ‘혼불’은 선택이 아니라 존재의 숙명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 1981년 5월
동아일보 창간 60주년 기념 2천만 원 고료 장편소설 공모혼불이 당선됐다. 공모전의 상금은 2천만 원으로 사상 초유의 고료였다. 당선작은 200자 원고지 1,700장 분량으로 1996년 총 10권으로 발간된 대하소설 『혼불』의 1부(1∼2권)에 해당한다.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에 들어선 최명희는 문예지와 일간지, 사보 등 다양한 매체에 수필과 칼럼, 콩트 등을 발표했다. 또한 『여성동아』 등에서 인터뷰 전문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그의 글은 삶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과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돋보였으며, 발표 때마다 큰 호응을 얻었다. 2009년 1월까지 밝혀진 작품은 6종으로 발표된 「혼불」을 제외하고, 소설 28편과 수필 156편, 콩트 20편, 시 1편 등 모두 205편이다.
• 1982년 11월
단편소설 주소住所몌별袂別을 발표했다.
• 1983년 4월
장편소설 혼불이 동아일보사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단편소설 이웃집 여자까치까치설날, 너희들의 날개를 발표했다.
• 1985년 9월
월간 『전통문화』에 장편소설 제망매가祭亡妹歌 연재를 시작했다. 전주천을 주요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1986년 4월까지 8개월간 연재되었으며, 이 작품을 통해 최명희는 무속과 판소리 등에 관한 지식이 가히 전문적 수준에 근접해 있다는 평을 얻었다. 독특한 흡인력을 가진 문체의 힘에 대해 작가는 극구 ‘전라도 산천, 전라도 가락, 전라도 말이 베풀어준 음덕’이라고 표현했다.
• 1986년 7월
장편수필 맺힌 고 풀리는 넋이 실린 『은산별신굿』을 임동권과 공저로 출간했다. 단편소설 이 아이를 발표했다
• 1988년 9월
월간 (신동아)에 『혼불』 제2부 연재를 시작하였다.

1990년대

• 1995년 10월까지
1988년 9월부터 시작한 소설 혼불의 『신동아』 연재를 마쳤다. 7년 2개월 동안 이어진 이 기록은 당시 월간지 소설 연재 사상 최장기록으로 남아 있다.
• 1990년 8월 9일
어머니가 돌아가신다.
• 1990년 12월
혼불 제1부와 제2부가 도서출판 한길사에서 전 4권으로 출간됐다.최명희는 지인들에게 ‘성보암 최보살’로 불렸다. 서울 역삼동 성보아파트에서 음각(陰刻)하듯 작품  집필에만 몰두해서 나온 말이다.
• 1991년
단편 「袂別」과 「쓰러지는 빛」이 ‘우리 시대의 한국문학'(계몽사) 25권에 실렸다.
• 1993년 7월
중국의 북경과 연변, 요녕성의 봉천(심양)과 흑룡강성의 목단강까지 64일 동안 취재여행을 다녔다. ‘혈혈단신’ 초행이었다. 대륙에 던져진 ‘돌멩이 하나’. 그런데 거기서도    ‘혼불’이 불 밝혀 길을 열어주었다. 취재수첩 ‘길광편우吉光片羽’(상서로운 빛(생각)이 깃털처럼 나부낀다)를 깨알같이 메모했다.
• 1994년 2월
 미국 일리노이주립대학교 동양학연구소 초청강연.  3월 미국 시카고대학교 ‘한국을 사랑하는 교수와 학생들의 모임’ 초청강연을 가졌다.
• 1995년 3월
뉴욕주립대학교 스토니브룩 한국학회 초청강연. 강연문 「나의 혼, 나의 문학」이 한국학과 고급 한국어 교재로 채택되었다.
• 1995년 10월
 1988년 9월부터 시작한 소설 「혼불」의 『신동아』 연재를 마쳤다. 장장 7년 2개월 동안 이어진 연재 기록은 당시 월간지 소설 연재 사상 최장기록으로 남아 있다. 육필로 쓴 원고는 원고지 12,000장에 달한다.
• 1996년 12월
 대하예술소설 「혼불」이 전 5부 10권으로 출간되었다. 책이 출간되자 일부 언론에서는 ‘완간’이라는 표현을 썼으나, 작가는 “이 작품은 아직 완간이 아니다. 작품의 시대 배경은 해방공간 이후 6․25, 4․19, 5․16 등 가까운 현대사까지 이어져 한국사의 격동기를 그리게 될 것”이며, “쓰면 쓸수록 이야기가 샘솟듯 흘러나와 20권이 될지 30권이 될지 짐작할 수 없다.”고 말했다.
• 1997년 9월
 한승헌, 고건, 강원룡 등 각계 명망가 150여 명이 국립국악원 뒤뜰 별맞이터에서 작가 최명희와 혼불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모임을 결성했다.
• 1998년 1월 12일 
 제15회 여성동아대상(동아일보사) 수상하였다.
• 1998년 6월 1일 
호암상(호암재단) 예술부문 수상하였다.
• 1998년 12월 11일 
 ‘아름다운 세상, 잘 살고 간다’는 유언을 남기고 영면(永眠). 장례는 5일장(전주시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15일 전주시청 앞에서 영결식이 열렸고, 고인의 생가와 모교인 기전여고를 거친 시가지 운구행렬에 이어 전북대학교에서 노제를 지냈다. 그리고 전주시 덕진동 건지산 자락, 파란 하늘과 배롱나무가 처연히 아름다운 동산에서 ‘지하의  만월’ 이 되었다. 향년 51세. 수십 년간 메모해 놓은 작가의 소재록에는 앞으로 써야 할 글감들이 무려 130여 개나 남아있었다.
• 1999년 12월
 교보문고가 각 분야 전문가 100명에게 조사의뢰 ‘90년대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었으며 최명희의 1주기를 추모하는 행사가 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현대문학이론학회 공동주최로 전북대학교에서 열렸다.

2000년대

• 2000년 5월
혼불기념사업회 발족(초대 위원장 : 두재균)하였다.
• 2001년 12월
혼불학술제와 혼불학술상, 최명희청년문학상을 중심으로 한 혼불문학제가 혼불기념사업회 주최로 시작되었다.
• 2004년 10월 20일
남원시 사매면 노봉리에 혼불문학관이 문을 열었다. 아버지의 고향이자 소설 「혼불」의 주 무대인 이곳은 ‘작품’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남원시에서 운영을 맡고 있다.
• 2006년 4월 25일
작가의 고향인 전주한옥마을에 최명희문학관이 문을 열었다. 전주시에서 세웠으며, 혼불기념사업회에서 운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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